사극
<장옥정>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며 제 궤도에 오른 듯하다. 조선시대 희대의 요화로 대표되는 장희빈의 이미지가 예전처럼 복기하듯, 여주인공 역에 김태희는 제 모습을 찾은 것일까. 극 초반부터 착하디 착한 패셔니스타 디자이너 앙드레장이 웬말이냐며, 왠지 낯설어 보이는 캐릭터 구성에 뭇매를 맞더니만, 제작진이 각성한(?) 것인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장옥정이 궁궐로 자진 입성해 욕망을 드러내며 숙종과 블링블링한 러브를 진행중에 있는 것. 그래서 그런가, 장옥정의 턴힐이 요즈음 화제거리다. 아닌가?! 그러면서 이 속에는 남인과 서인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파벌 싸움이 관통하고 있다. 알다시피, 사극의 배경이 되는 숙종 시기는 당쟁이 가장 극심했던 기간. 숙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조정의 당파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환국'(煥局)의 방식을 택하며 활로를 찾았다.
그 속에서 여전히 권력 장악을 노리는 서인과 남인이 버티고 있다. 서인세력인 인현왕후와 남인세력인 장희빈의 갈등은 당쟁의 대리전이 되었고, 숙종은 이를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시키는 영민함을 보였다. 이런 와중에
인현왕후와
장희빈, 두 여인을 뒤에서 조정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굳혀가는 두 대모가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명성왕후 김씨와 대왕대비 조씨였다. 사극 '장옥정'에서 색다른 재미이자 볼거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에 역사적으로 정리 들어간다. 먼저, 주인공 젊은 숙종 이순이다.
숙종은 현종의 장남이며, 명성왕후 김씨 소생이다. 1661년 8월 15일에 경덕궁 회상전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순, 자는 명보다. 1667년에 7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674년에 14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곧바로 친정을 시작하였다. 숙종시대는 붕당 정치가 절정에 이른 때였다. 특히 현종 때부터 지속되어온 예송논쟁(왕실에 적용할 상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벌인 논쟁으로 한마디로 예절에 관한 논란꺼리로 치고박고 하는 거)은 숙종의 처신을 매우 곤란하게 하였다.
과감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숙종은 논쟁이 가열되자,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유배시키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며 남인 중심으로 조정을 이끌어갔다. 하지만 남인의 영수 허적의 힘이 극대화되자, 숙종은 다시 남인 세력을 대거 축출하고 서인을 중용하였다. 이후에 후궁 장옥정이 왕자 윤을 낳자, 숙종은 윤을 세자로 세웠는데, 서인들이 있는 힘을 다하여 반대하고 나왔다. 그러자 숙종은 서인들을 숙청하고 급기야 송시열도 죽여 버렸다. 또한 이 사건과 관련하여 정비였던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되고, 장옥정이 중전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장옥정과 숙종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고, 장옥정은 희빈으로 강등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결국 희빈 장씨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듯 숙종의 46년 치세는 살얼음판 정치였다. 그러나 숙종은 스스로 왕권을 확립하고 아내와 외척까지도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냉철한 면모를 보였다. 조정이 끊임없는 정쟁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극력과 경제가 안정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정치 수완 때문이었다. 숙종은 45년 10개월 동안 재위하다가 1720년 6월 8일에에 6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청나라에서 현의의 시호를 내렸고, 조선 조정에서 숙종의 묘호를 올렸다. 여기에 여러 시호가 추가되어 정식 묘호는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며원효대왕'이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서오릉 안에 있으며, 능호는 명릉이다. 그는 3명의 정비와 6명의 후궁을 두었고, 그들에게서 적자, 적녀 2남 2녀와 서자 4남을 얻었다.
명성왕후 김씨(1642~1683)
서인 집안인 청풍 김씨 우명의 딸인 그녀는 1642년 5월 17일 장통방 사저에서 태어났으며, 1651년 10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어 현종과 가례를 올렸다. 1659년 현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674년에 현종이 죽자, 대비에 올랐다. 그녀가 대비에 올랐을 때 나이는 불과 33세였고, 왕위에 오른 숙종은 14세였다. 숙종이 정치에 대한 이해가 빠르고 일찍 문리를 깨친 까닭에 어린 나이임에도 바로 친정을 했지만, 명성왕후는 내심 수렴청정을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때문에 정사에 간섭을 하는 일이 잦았고, 아버지 김우명과 사촌 도생 김석주를 앞세워 조정을 장악하려는 의도도 드러냈다.
숙종 즉위 초인 1675년에 이른바 '홍수의 변'(궁녀의 별칭)이 일어났다. 이는 인평대군(인조의 셋째아들)의 아들들인 복창군 이정과
복선군 이남이 궁녀와 관계했다는 소문이 퍼졌는데,
명성왕후가 그 말을 듣고 부친
김우명에게 복창군 형제들을 탄핵하라고 하였다. 국상 중에 종친이 궁녀를 건드렸으니, 당연히 탄핵의 명분이 되었다. 하지만 명성왕후가 그들 형제를 죽이려고 한 것은 그들 3형제가 남인 세력과 힘을 합쳐 왕위를 찬탈할 위험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 당시 복창군, 복평군(이연), 복선군 등 3형제는 정치인들과 깊은 교분을 맺고 있었고, 그들의 외숙인 오정창 등은 남인의 중심 인물이었다. 김우명은 그런 여러 정치적인 부분을 고려하여 함부로 나서지 않았는데, 막상 명성왕후로부터 복창군 형제가 국상 중에 궁녀들과 간통했다는 말을 듣고 숙종에게 그 내용을 고변했던 것이다.
이 일로 숙종은 복평군과 복선군을 가뒀고, 결국 고문을 이기지 못한 두 궁녀가 간통 사실을 자백했는데, 남인들이 대거 반발했다. 당시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인
허적이 숙종에게 김우명이 무고로 궁녀들의 자백을 받아 왕손들을 죽이려고 하니, 오히려 김우명을 벌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편전의 휘장 뒤에 숨어 있던 명성왕후가 갑자기 튀어나와 허적을 노려보며 고함을 쳤다. "너는 선대 여러 왕의 은혜를 입고 신하로서 영광을 누렸는데, 어찌하여 은혜를 갚는 것엔 눈을 두지 않고, 내가 직접 눈으로 본 것을 어째서 애매한 일이라고 하느냐?" 명성왕후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허적을 나무랐고, 허적은 민망하여 복창군 형제에게 죄줄 것을 주청하고 편전을 물러났다.
명성왕후는 이렇듯 노골적으로 서인 편을 들며 사사건건 정사에 간섭하였고, 그로 인해 숙종과 명성왕후 사이가 멀어지는 사태도 벌어졌다. 남인 축출을 위해 직접적으로 정치에 개입한 그녀에게 있어서, 남인 사람인 궁녀 장옥정이 왕의 총애를 받는다는 사실은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명성왕후는 장씨의 흠결을 지적하여 궁에서 쫓아냈다. 그러나 1683년 명성왕후 사망 후 장씨는 다시 궁에 들어오게 되는데, 특이한 것은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한 사람은 인현왕후라는 사실이다. 당시 중전이었던 인현왕후는
"왕의 사랑을 받는 궁인이 민가에 나가 있는 것은 옳지 않다"며 장씨를 불러들이도록 왕에게 간청하였다. 기존의 드라마에서 그랬듯이.. 아무튼 장옥정 킬러 시어머니 명성왕후의 생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는 1683년 12월 5일 창경궁 저승전에서 세상을 떴는데, 그때 나이는 불과 42세였다. 그녀의 소생으로는 숙종을 비롯하여 명선, 명혜, 명안공주 등 1남 3녀가 있다. 능은 숭릉으로 현종과 함께 경기도 구리시에 묻혔다.
* 장렬왕후 조씨 (1624~1688)
장렬왕후는 조선 후기의 당쟁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 인물로 나름 중요한 위치에 있는 여인이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늙은 인조와 결혼했기 때문에 숙종시대까지 살았는데, 그 때문에 효종, 현종 등이 죽은 뒤에 복상 문제에 휘말리게 된다. 이 복상 문제는 '예송 논쟁'을 일으켜 서인과 남인간의 치열한 당쟁을 야기시켰다.
장렬왕후는 양조 조씨 창원의 딸로 1624년 11월 7일 직산 관아에서 태어났다. 1635년 인조의 정비 인렬왕후가 죽자 3년 뒤인 1638년 15세의 어린 나이로 44세인 인조와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그녀가 26세 되던 1649년, 인조는 생을 마감했고, 그녀는 젊은 나이로 대비가 되어야 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659년엔 효종마저 죽었고, 1674년에는 손자인 현종마저 죽었다. 그녀는 증손자 숙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14년을 더 살다가 1688년 8월 26일 창경궁 내반원에서 6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아들과 손자, 증손자가 차례로 왕위에 오르는 동안 그녀는 대비, 왕대비, 대왕대비 등으로 호칭이 격상되었고, 이때마다 그녀의 복상문제가 당쟁의 화두가 되었다. 문제는 효종을 장남으로 대우하느냐, 차남으로 대우하느냐에 있었다. 효종은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남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것이 남인의 주장이었던 것에 비해, 서인은 비록 왕이라도 차남인 사실은 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효종이 장남으로 치부될 경우 장렬왕후는 상복을 3년 동안 입어야 했고, 차남으로 취급될 경우엔 1년 동안만 입으면 되었다. 이 문제는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죽은 뒤에도 그녀가 상복을 1년 동안 입어야 하느냐, 9개월 동안 입어야 하느냐는 논쟁으로 이어졌다. 두 번의 논쟁 과정에서 현종은 한번은 서인의 손을 들어주고, 한번은 남인의 손을 들어주는 정치적 판단을 내렸다. 이 때문에 조정이 몹시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능은 휘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에 있다.
사극 '장옥정'에서 대왕대비 조씨 자의대비가 흥미로운 대목은 이것이다. 그녀가 두 차례의 예송논쟁을 거치면서 서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 김씨나 숙종의 왕비로 맞이한 인경왕후, 인현왕후는 모두 서인 출신. 자의대비는 자연히 남인 계열의 장옥정을 특별히 아꼈다는 게 정설. 그래서 장씨가 훗날 궁에서 쫓겨났을 때, 인조의 다섯째 아들 숭선군(이징)의 부인을 시켜 장옥정을 돌봐주도록 하였다. 왕실 종친의 부인이 직접 궁녀를 살펴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숙종이 여전히 마음에 두고 있는 장씨가 언젠가는 궁에 다시 들어와 권력을 잡으리라고 본 것이다. 실록에서도 장씨가 다시 궁에 들어왔을 때의 상황을
"자의전은 장의 아내를 믿고 장씨를 치우치게 사랑하여 중전 민씨와는 소원하였다"고 기록함으로써 이를 짐작케 한다. 그만큼 자의대비는 장옥정에게 있어서 정치적 후견인 대모를 자처했던 것이다.
그런 자의대비 장렬왕후 조씨의 풋풋한 모습을 보고 싶다면 인조시대
'궁중잔혹사' 속에 있다.
주말 화에서, 8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를 조근하게 혼내는 어린 중전의 모습은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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