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영화 '은교'가 어제(26일) 개봉하며 베일을 벗었다. 하지만 개봉 전 시사회를 통해서 싱그러운 처자 '김고은'의 파격적인 노출과 정사신으로 연일 화제가 된 문제작(?), 이와 관련해서 개인적으로도 언급한 적이 있다. 영화는 분명 그게 다가 아닐지다. 그러면서 박범신의 원작소설 '은교'도 같은 선상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그렇다면 이 다른 장르에서 내건 이야기는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을까? 이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어느 것 하나 정확히 답을 찾을 수는 없다. 왜냐? 개인적으로 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고, 소설은 아직 다 읽지 못했다. 하지만 소설은 지금 읽고 있는 중이다. 역시 비주얼로 표출된 영화와는 다른 맛이다. 문학 소설답게 깊이가 있다. 박범신 특유의 사색하는 감상의 포인트가 심상을 깊게 파고든다.
이른바 '갈망의 삼부작' 완결편이라 할 수 있는 소설 '은교'는 그래서 고요하고 적막한 밤에 읽기가 좋다. 싱그러운 봄처녀의 햇살을 버금은 그런 청초한 밝음과 다르게 꽤나 정적이고 고즈넉하다. 그래서 70세의 시인 이적요가 바라본 '은교'의 수사는 잔잔한 호숫가에 물결처럼 요동치지 않게 정갈한 느낌마저 준다. 때로는 격정을 보일 듯 했지만.. 은교를 첫 마주했을때 만큼은 꽤 정교하게 잊혀지지 않는 강렬함으로 시인 이적요의 심상은 이러했다. 그것이 바로 죽기 전에 시인이 남긴 노트 '창(槍)' 단락에서 말하는 은교다. 이에 있는 그대로 옮겨 보는데.. 영화가 주지 못하는 그런 말글의 향연을 음미해 보자. ~
"한 소녀가 데크의 의자에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나는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햇빛이 밝았다. 처음 보는 소녀가 아닌가. 대문은 분명히 잠긴 그대로였다. 본채의 거실 앞에서 정원 가운데로 뻗어나와 있는 데크엔 햇빛과 소나무 그늘이 알맞게 섞여 있었다. 등나무로 엮어 만든 내 흔들의자에 소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져 있었다. '놓여져'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오랫동안 가지고 있어 내 살붙이 같은 것인 줄 알기 때문에, 그 의자에 감히 다른 사람이 앉는 일이 없었다. 이런, 고이연...... 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바로 그때 숨소리가 들렸다. 소녀의 숨소리였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소녀의 맞은편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처음엔 소녀의 숨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소나무 그늘이 소녀의 턱 언저리에 걸려 있었다. 사위는 물속처럼 고요했다. 나는 곤히 잠든 소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열대엿 살이나 됐을까. 명털이 뽀시시한 소녀였다. 턱 언저리부터 허리께까지, 하오의 햇빛을 받고 있는 상반신은 하앴다.
쇠별꽃처럼.
고향집 뒤란의 개울가에 무리져 피던 쇠별꽃이 내 머릿속에 두서없이 흘러갔다. 브리아린 반팔 티셔츠가 흰 빛깔이어서 더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쌔근쌔근, 숨소리가 계속됐다. 고요하면서도 밝은 나팔 소리 같았다. 마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처럼. 누군가의 숨소리를 이렇게 생생히 듣는 일은 처음이었다. 눈썹은 소복했고 이마는 희고 맨들맨들, 튀어나와 있었다. 소녀가 아니라 혹 소년인가. 짧게 커트한 머리칼은 윤이 났다. 갸름한 목선을 타고 흘러내린 정맥이 푸르스름했다. 햇빛이 어찌나 맑은지 잘 보면 소녀의 내장까지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팔걸이에 걸쳐진 양손과 팔은 어린아이의 그것만큼 가늘었다. 콧날엔 땀방울이 송골, 맺혀 있었다. 초목 옆에서 나고 자란 소녀가 이럴 터였다. 침이 고였다. 애처로운 보이는 체형에 비해 가슴은 사뭇 불끈했다. 한쪽 가슴은 오그린 팔에 접혀 있고, 한쪽 가슴은 오히려 솟아올라 셔츠 위로 기웃, 융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보았다. 창(槍)이었다.
창 끝이 쇄골 가까이 솟아 있었다. 처음엔 목걸이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문신이었다. 셔츠의 브이라인 아래에서부터 직립해 올라온 푸른 창날에 햇빛이 닿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고인 침이 꿀꺽 목울대를 넘어갔다. 정교한 세필로 그려진 창이었다. 가슴에 그려넣은 창의 문신이라니. 그렇다면 창의 손잡이는 셔츠 속에 감춰진 젖가슴이 단단히 거머쥐고 있을 터였다. 창날은 날카롭고 당당했다. 셔츠 속에 은신한 채 이쪽을 노리고 있는 전사를 나는 상상했다. 흰 휘장 뒤에서 전사는 황홀한 빅뱅을 꿈꾸며 지금 가파르게 팽창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사의 창날에 바람 같은 긴 풀들이 소리 없이 베어지는 이미지가 찰나적으로 흘렀다. 풀은 베어지고, 그리고 선홍빛 피로 물들었다. 손끝이 푸르르 떨렸다. 앞으로 나가려는 손끝을 내 의지가 안간힘을 다해 볼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욕망인가.
욕망이라면. 목이라도 베이고 싶은, 저돌적인 욕망이었다.
너무 낯선 감정이어서 순간 나는 아주 당황했다. 소녀의 숨소리가 어느새 점령군의 군화 소리처럼 폭력적으로 귓구멍을 울리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불끈한 가슴과 쇄골과 직립한 창 끝이 유연하고 역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했다. 쇄골을 치고 나온 땀방울 하나가 한순간 창 끝을 적시면서 또르르 굴러 셔츠 안으로 재빨리 흘러들어갔다.
우주의 비밀을 본 것 같았다."
이것이 시인 이적요가 은교를 처음 봤을 때 글에 투영된 심상이다. 어떻게 느낌이 오시는가.. 영화가 주지 못하는 이 은유적이면서 디테일한 수사로 '은교'는 그렇게 시인 이적요 마음 속에 영원히 박혀 버렸다. "은교를 만나고 내 세상은 무너졌다" 는 강렬한 표현처럼 그만의 영원한 처녀로 다가온 '은교'.. 원작소설과 영화의 느낌이 어떻게 다르고 같게 다가올지 나름 기대해 본다. 역시 문학소설은 글의 음미다.
은교 - 박범신 지음/문학동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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