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피 속에 태어난 새로운 왕국. 조선의 주인은 누구인가
1398년, 태조 이성계는 제 손에 피를 묻혀 개국을 일군 왕자 이방원(장혁)이 아닌 어린 막내 아들을 정도전의 비호 하에 세자로 책봉하고, 왕좌와 권력을 둘러싼 핏빛 싸움이 예고된다. 한편, 정도전의 사위이자, 태조의 사위 진(강하늘)을 아들로 둔 장군 김민재(신하균)는 북의 여진족과 남의 왜구로부터 끊임없이 위태로운 조선의 국경선을 지켜낸 공로로 군 총사령관이 된다.
왕좌와 권력을 향한 야망의 조선, 그 뒤에 숨은 순수의 시대
왕이 될 수 없었던 왕자 이방원, 여진족 어미 소생으로 정도전의 개로 불린 민재와 그의 친자가 아니라는 비밀 속에 쾌락만을 쫓는 부마 진. 민재는 어미를 닮은 모습의 기녀 가희(강한나)에게서 난생 처음 지키고 싶은 제 것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의 최초의 반역, 야망의 시대를 거스르는 그의 순수는 난세의 한가운데 선 세 남자와 막 태어난 왕국 조선의 운명을 바꿀 피바람을 불러온다.
아래는 스포일러 포함.
영화 '순수의 시대'는 사극의 양태에서 정통 멜로를 지향하는 이른바 격정과 파격을 노린 성인사극이다 . 역사적 사건으로 이방원이 권좌를 찬탈할 목적으로 일으킨 1차 왕자의 난을 배경으로 한다. 그 안에 가상의 인물 세 명을 포진시켜 벌이는 이들의 얽히고설킨 팩션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 인물 이방원과 정도전의 권력 암투 대립에, 가상인물로 정도전의 사위이자 조선 최고의 무장인 김민재가 극의 중심을 잡고, 그의 양아들이자 왕의 사위 진과 매혹적인 기녀 가희가 나서며 어떤 파국을 향해 나아간다. 결코 순수의 시대라고 할 수 없었던 그 시절 '왕자의 난' 격랑 속에서 조선 최고의 장수와 기녀의 격정적인 사랑이 메인 테마인 것이다.
우연찮게 연회장에서 가희를 본 민재는 처음으로 지키고 싶은 것을 발견하고 그녀와의 격정적인 사랑에 빠져든다. 그럴수록 가희는 무언가 묘한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그녀 또한 민재를 놓치 않으려 한다. (이 대목에서 반전 코드로 가희는 이방원이 심어 놓은 기녀란 사실. 민재에게 붙여 어떤 수를 노리려고 한 것인데, 여기엔 민재의 아들 진과의 과거 악연이 단초가 된다. 사랑과 복수 사이에 갈등하는 여인이란 점) 결국 정도전을 제거하려는 이방원은 민재와 가희, 그리고 진, 세 사람의 불륜을 이용해 제거하려 들면서, 둘은 위기에 처하고 민재는 그녀를 위해 마지막으로 칼을 뽑아든다. 이렇게 이야기만 놓고 보면 간단한 플롯이다. 조선 최고의 장군이자 상남자인 민재가 기녀 가희와의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그녀가 무슨 잘못을 했건 말건 묵묵히 지켜내는 그만의 뜨거운 순애보에 초점을 맞춘 정통격정멜로 사극인 것이다.
이런 설정은 다소 진부해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하균신에 의해 우직하면서도 매력적인 인물로 만들어져 극의 무게감을 전달한다. 가희 역에 강한나 또한 신예에도 불구하고, 고혹과 매혹을 오가는 관능미를 보이며 몇 차례 베드신 열연을 선보이는데, (한국판 색계?) 이런 정사신이 이야기에 녹아들기 보다는 남자들 세계에서 착취당하면서 살아온 인생사를 담아내기엔 왠지 모르게 그릇이 작아 보인다. 강하늘의 비릿한 표정과 나쁜남자의 모습은 나름의 묘미로 다가오는데, 장혁만의 호방한 웃음소리로 묘사된 이방원은 마치 '빛미'에서 왕소 역을 보는 것 같아 때론 실소를 머금게 한다. 다만 말들을 죽이고 핏빛이 된 채 민재에게 "내어줄 말이 없네" 할 때는 나름 카리스마 넘치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전반적으로 이야기는 볼만하지만, 주요 서사인 한 남자의 애절하고 순애보적인 정통 멜로 사극으로써, 민재와 가희 둘의 심리 묘사에 치중했어야 하는데, 민재가 가희에게 왜 그토록 빠져들고 지켜내려 했는지 급작스러워 이입이 잘 되지 않아 치명적이다. 이방원과 김민재 둘의 대결도 많지 않아 그리 폭발적이지 않고, 각기 인물들이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비장하게 나서지만 따로 놀듯 장황한 느낌마저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배우들의 열연 만큼은 점수를 가히 줄 만하다. 특히 신하균의 첫 사극치곤 나름 성공적으로 보인다.
한줄 평 : 왕자의 난이라는 역사적 팩트 위에, 순애보적이며 우직한 조선 최고의 장수와 매혹적인 기녀의 격정멜로를 중심으로 담아낸다. 각기 인물들의 연기는 볼만하게 펼쳐지며 사연으로 충돌하지만 그 시너지는 미흡하다. 과연 순수의 시대는 욕망을 야기한 시대의 아이러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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